제96회 거창군의회(임시회ㆍ정례회)

청원심사특별위원회(소위원회)회의록

제4호
거창군의회사무과

일시 : 2003년1월28일(화) 오후2시8분
장소 : 산업건설위원회실

의사일정
1. 한국전쟁전후거창군관내민간인희생자청원의건(계속)

심사된안건
1. 한국전쟁전후거창군관내민간인희생자청원의건(계속)(최용환ㆍ정연명ㆍ이수정의원소개)

(14시08분 개의)

○소위원장 최용환 자리를 정돈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성원이 되었으므로 지금부터 청원심사 소위원회 제4차 회의를 개의하겠습니다.

1. 한국전쟁전후거창군관내민간인희생자청원의건(계속)(최용환ㆍ정연명ㆍ이수정의원소개)
○소위원장 최용환 의사일정 제1항 한국전쟁 전후 거창군관내 민간인 희생자 청원의 건을 상정합니다. 오늘은 합천군 봉산면 권빈재, 묘산면 마령재 희생자 유족의 1차 증언결과 미진한 부분에 대해서 보충증언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예, 유족 여러분! 먼길 오신다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오늘은 위원 인사는 생략하고 바로 보충증언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7일 있었던 증언에서 빠진 부분이나 또 새로운 증언이 있으신 분은 증언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 위원장님! 진행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진술인 엄창주  날씨도 추운데 연일 우리 유족들 때문에 노고 많으신 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유족들께 많이 모이라고 전달은 했습니다만, 객지에 계시고 하니까 전달이 되었지만 자기들 사정에 의해서 참석이 많이 못 되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그러면 오늘은 미진한 부분에 대해서 묻는 데 우리가 답변하는, 그런 식으로 해 주시고 사실상 젊은 사람들은 지난 증언시에 안 온 분도 있습니다마는, 이분들은 탄생하지도 않았고 그 당시에, 손자고 이렇기 때문에 사실상 유족으로서의 자격을 가지고 왔지 내용을 잘 모르고 하니까 미진한 부분에 대해서만 해 주시고 혹시 유족들 중에서도 그에 대해서 빠진 부분에 증언할 것이 있으면 이 자리에서 해 주시기 바랍니다. 누가 그런 분 계십니까?
○소위원장 최용환 네, 저번에 참석 못 하고 오늘 새로이 참석하신 유족들이 계시면 한번.
○진술인 엄창주 예, 거기에 지금 할머니 두 분이 오셨는데 한 분은 영감님이 당하셨고 그런데, 딸이 부산에서 주용옥 씨라고 등록되어 있다가 동생이 전화가 왔어요, 저한테로, 동생이 거창에 계시더구만? 그래서 동생이 될 수 있으면 나와서 얘기 듣고 가라고 전달했습니다마는, 그것도 보니까 바쁜 것같아요. 그래서 모친을 내 보냈는데, 사실상 할머니도 그 내용에 대해서 기억이 잘 안 날 것같고, 또 진주에서 한 분이 왔는데 저 사람은, 공직에 안 있고 현대자동차인가 간부로 있으면서 바쁜 몸에도 이렇게 왔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그 당시 (웃음) 탄생도 안 했고 이래서 사실상 내용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그러니까 별 증언이 없지 싶습니다.
○소위원장 최용환 예, 여기까지 오셨는데 자리가 이렇습니다마는, 좀 편안하게, 평소에 사석에서 말씀 나누듯이 편안하게 말씀해 주시면 고맙고, 그러면 분위기를 바꾸도록 하겠습니다. 이 자리에 조익현 대성중학교 선생님이 나오셨습니다. 보충적으로 이런 희생자가 왜 생겼는지 그 배경에 대해서 참고로 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참고인 조익현 예, 원래 공식명칭이, 우리가 흔히 보도연맹,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원래 명칭은 국민보도연맹입니다. 해방 후에, 1949년도입니다, 이승만 정권이 정권유지를 위해서 고안해 낸 좌익포섭단체입니다. 조직결성에 기해진 명목은 개선의 여지가 있는 좌익세력에게 전향의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었는데 조직 이름도 보도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한자를, 잘못하면 우리가 언론보도,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데 보 자가 보할 보 자에 도 자가 선도한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보호하여 지도한다 라는 뜻의 연맹입니다. 그런데 사실 실제적으로 이 보도연맹을 만든 목적은 좌익세력의 보도라기보다는 좌익세력의 색출에 있었으며, 더 큰 뜻은 48년 이승만 정권의 초대 정부 수립이 자기 지지세력도 미약했고 해서 상당히 불안한 정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에 반대되는 세력, 민족진영등 반정부 세력을 단속통제하는 데 그 뜻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승만 정권이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자기가 정권 유지 차원에서, 그래서 만들었던 것이 49년 12월달에 했던 국가보안법, 그 다음에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기구로서 보도연맹, 이렇게 조직했습니다. 보도연맹은 이미 37년에 일제시대때 흔히 사상범, 사상범들을 통제하는 목적으로 만들었던 “대화숙”, 나중에 이름이 “사상보국연맹”이라고 하는데, 거기에서 본따가지고 보도연맹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보도연맹은 그 당시 미군정과 남한 단독 정부수립을 반대하고 친일세력 척결을 외쳤던 민족주의자들을 함께 처단하는 그런 어떤 연맹이었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보도연맹이 조직된 것은 1949년 6월 5일입니다. 서울에서 중앙본부 결성식을 가졌고, 결성식을 기점으로 전국적인 조직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조직확대 사업이 계속되는데 언제까지 하느냐 하면 6‧25 발발 직전까지, 그러니까 49년 6월 5일부터 시작해서 그 다음해, 50년 6월 25일까지 했는데 경남은 49년 11월 20일 도연맹 결성 선포대회가 열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 11월 20일 이후에 그 해 12월 한 달 동안 아마, 경상남도 각 시‧군 단위에 보도연맹 조직 사업이 완료가 되었는데 우리 거창이 정확하게 어느 날짜에 보도연맹 결성이 선포되어 있었는지는, 거창 군단위에는 정확한 날짜는 잘, 제가 알지 못 하고 있습니다. 다만, 49년 12월 3일자, 민주중보라는 신문보도에 의하면 흔히 자기들이 말할 때 보도연맹 자수자라고 합니다, 경남도내에 자수자가 5,000 여 명이었던 걸로 도 경찰국이 발표를 했다고 되어 있고, 거창은 그 당시에 217명이라는 기사가 나옵니다. 그래서 제가, 의구심이 나는 것은 지금 유족들 이외에, 제가 또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분 중에 가조에 한 분이, 자기 아버님이 보도연맹 사건으로 돌아가셨다는 증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지금 저하고 가까운 교직에 계신 분인데 부친이, 돌아가셨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것도 참 보면, 지금 바로 말씀드리지만, 구장하고 싸웠다는 그것 때문에 구장이 그만 이름을 적어넣어가지고 보도연맹에 끌려가서 자기는 자세히는 모르는데, 권빈재에서 아마, 자기 아버님이 학살당했을 것이다 라고 저한테 증언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보도연맹이 그런 좌익세력뿐만 아니라 인원을 확충하는 과정에서 보도연맹 중앙본부가 지방행정 단위에 목표 인원수를 할당을 줬습니다. 어떤 시‧군에 몇 명씩 할당을 줬다는 증언이 있습니다. 때문에, 일선행정기관들은 할당한 인원을 채우기 위해서 사상과 전혀 무관한 민간인들을 끌어들이는 변칙을 감행했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유족분들의 증언이 있을 겁니다. 전혀 사상과 관계없는 그런 변칙을 감행해서 특히, 피해지역을 보면, 주로 보도연맹을 독려하고 다닌 사람들이 구장이라든지 경찰관, 혹은 우익단체원, 이런 사람들이, 할당을 목표를 정해가지고 독려하고 다녔다고 그럽니다. 유족들의 증언에 보면 “야산대”에 끌려가지고, 흔히 우리가 “빨치산”이라고 그럽니다, 끌려가서 단 한번이라도 부역을 하거나 음식물을 제공한 자는 보도연맹에 들었어야 되고, 농민조합이나 어민조합에 가입한 자, 그 다음에 일본유학생이나 대학생, 그 다음에 빨갱이를 동정하는 마음을 가진 적이 있는가 라는 그런 어떤 유도신문에서 있다 라고 되면 그것도 보도연맹에 가입이 되고, 또 좌익성 발언을 한 적이 있었던 모임에 참가한 자, 이런 식으로 해서 보도연맹에 가입했는데, 전체 그 당시 맹원수가 50년대초에 전국적으로 한 30만 명 정도 되고, 전쟁이 터지기 직전에는 한 33만 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경남지역은 전체적으로 최소 한 5만 명 정도, 이렇게 추정됩니다. 그래서 그 당시 이렇게 보도연맹을 모집하면서 정부는, 좌익사상을 버리고 자수 전향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신변보호를 약속을 했습니다. 그러나 50년 6월 25일 전쟁이 터지자 이 정책에 출연한 맹원들은, 한 마디로 얘기해서 전쟁중인데 재판 절차 없이 전원 집단학살을 했습니다. 정부가 어떤 이유로도 그들을 죽일 근거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보도연맹원들을 학살했느냐? 다만 자기들의 추측입니다. 적에 동조할 지 모른다는 단순한 가능성 하나, 이것 때문에 예방 학살, 예방 학살 차원입니다. 그런데 학살은 전선의 급격한 후퇴로 해서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서울과 경기도에는 희생자가 적습니다. 그런데, 그 외에는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전국에 걸쳐 일어났는데 특히, 그 중에서도 비점령 지역인 부산을 포함한 경남 일원에서 가장 피해가 많이 발생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현재 국민보도연맹 관계로서 단행본으로 나온 책자는, 역사비평사에서 나온 “끝나지 않은 전쟁, 국민보도연맹” 이라고 부산, 경남 지역에, 부산일보 김기진 기자가 거기에 대한 주로, 언론보도 자료를 이용해가지고 상세히 이렇게, 여기에도 거창에 관계된 자료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이 아마, 현재 우리 나라에 나와 있는 보도연맹 자료로써 가장 지금 현재, 방대한, 특히 우리 부산‧경남지역입니다, 책자로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잘 아시다시피 학살된 보도연맹원의 절대 다수는 정권의 회유와 협박 등에 못 이겨 도장을 찍은 사람들입니다. 사실 그 당시 골수 좌익들은 처음부터 가입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또 이 사람들이 이미 6‧25 발발 이전에 지리산등 산 속으로 숨어들어 빨치산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흔히 우리가 역사적으로 이런 사람들을 한국 전쟁 전에 활동했던 빨치산을 “구빨치”라고 하는데, 구빨치로 다,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 대표적 인물이 49년 8‧23사건, 거창에, 1949년 8‧23 빨치산 부대를 이끌어가지고 거창읍 경찰서와 관공서를 습격했던 김명식이라는 분도 구빨치에 해당됩니다. 이런 분들은 이미, 사실 자기가 좌익활동을 하면서, 빨치산 활동을 한 사람들은 들지도 않았고, 전부 다 산으로 다 올라간 상태였습니다. 아니면, 이미 체포되어가지고 형무소에 수감되는 그런, 주로 대전형무소에 많이 수감되었습니다. 그런 실태였습니다. 지금 거창에서 보도연맹사건으로 희생된 숫자를 아주 정확하게 알지를 못 합니다. 앞으로 조사가 정확하게 조사되어야 되는데, 우리는 단지, 제일 많이 희생된 데가 우리가 흔히 잘 알고 있는 데가 권빈재와 마령재, 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북상 골짜기에서도 많은 사람이 보도연맹에 관계되어 학살되었다는 증언이 있고, 지금 96명, 217명, 여기에 국민보도연맹 자료에 보면 언론보도라고 하는데 120명, 이런 식으로 숫자가 나옵니다. 더 많은 유족들의 증언이 있어야만이 아마, 이 문제가 정확하게 조사될 거라고 봅니다. 지난번 제가 거창군사 발간때 거창군사 근‧현대사 부분의 집필자로서 부끄럽게도 보도연맹 관계를 서술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는 유족들의 증언을 전혀 제가, 이런 증언들이 나올 것을 도저히 몰랐습니다. 모르고 그냥 간략하게 써버렸는데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진실의 역사기록을 한번 진짜, 제가 바른 정사의 정론집필의 마음으로서 바르게 역사를 집필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여러 유족들에게 제가 도울 수 있는 있으면, 군의회에도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제가 성심껏 열심히 도우도록 하겠습니다. 이상입니다.
○소위원장 최용환 네, 감사합니다. 굴절된 역사를 진상규명을 위해서 애쓰시는 선생님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리고 우리 위원회에서도 방향을 잡는데 참고로 하겠습니다. 조익현 선생님이 참고로 증언을 하셨는데 위원님들, 질의하실 위원님 계시면 질의해 주십시오. 예, 없으시면 뒤에, 오늘 처음으로 참석하신 젊은 분들 중에서 위원회에 부탁말씀이나 또, 여기까지 오셨는데 한말씀해 주셔도 되겠습니다. 들은 대로 편안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참고인 엄명균 저는 조부님이 희생을 당하셨는데.
○소위원장 최용환 성함을 한번 말씀해 주시고, 사는 데도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참고인 엄명균 저는 조부님 되시고 본인은 엄명균입니다. 진주에 있고, 어제 전화를 받고 왔는데 사실은, 어릴 때 아버님한테 그런 이야기를 쭉 들었습니다, 억울하게 희생을 당하셨다고, 저도 나이가 젊은 나이에, 명예회복 되었으면 싶었는데 마침 어제 전화를 하셔서 좋은 기회다 싶어서 오늘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돌아가신 분은 제가 보기는 억울하게 돌아가신 것같고, 정권이 바뀌면 그런 경우가 많이 생기듯이 희생양이 되지 않았냐,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차피 좋은 결과가 일어나가지고 명예가 회복되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사실 내용은 잘 모릅니다, 이상입니다.
○소위원장 최용환 예, 고맙습니다. 뒤쪽에 계시는 할머니, 아주머니! 두 분 중에서 한번 말씀을.
○진술인 장현애 저도 그대로입니다.
이수정 위원 아시는 대로 말씀 한번 하세요.
○진술인 장현애 그 당시에.
이수정 위원 이리 나오셔가지고, 마이크에, 전부 속기가 되고 녹음이 됩니다.
○소위원장 최용환 네, 편안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진술인 장현애 말을 하려 하니까 떨려서요.
○소위원장 최용환 (웃음) 여기는 안 떨려도 됩니다.
이수정 위원 (웃음) 여기는 군의회 의원들이 하는 거니까, 그 당시 설명만 해 주시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책으로 만들어서 중앙정부에 건의할 거예요.
○진술인 장현애 나는 우리 딸 오거든 물어보십시오.
이수정 위원 딸 오면요?
○소위원장 최용환 네.
이수정 위원 그러면 제가.
○소위원장 최용환 네, 이수정 위원님, 말씀해 주십시오.
이수정 위원 이수정 위원입니다. 오늘 이렇게 바쁘신데도 불구하고 유족회에서 관심을 가지고 참석해 주신 데 대해서 감사를 드리고요, 특히 조익현 선생님께서 보도연맹에 대해서 너무 상세하게 알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 유족들이 크게 할 얘기가 없는 것같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저희들이 지금 신문광고도 3개 사를 내 놓고, 또 군수를 통해서 읍면의 면장들을 통해서 이장들을 통해서 유족이 있는가 없는가 지금 확인중에 있습니다. 그래서 2월 15일까지 전부다 확인을 해가지고 우리는 이걸 전부다 취합해서 더 증언을 들을 것이 있으면, 아직까지 시간이 많이 있기 때문에 증언을 많이 들어가지고 청취를 해서 중앙정부에, 국회에 보내서 여러분들의 억울하게 돌아가신 영혼들을 위해서 명예회복을 해볼까 싶어서 우리가 이걸 시작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오늘뿐만 아니고 앞으로도 시간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아까 할머니 말씀하셨다시피, 따님이 또 그 내용을 잘 아시거든 언제 의회에 와서 증언을 해 주시면 녹음이 되고 속기사가 속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든 것을 바르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니까 협조를 많이 해 주시고 또, 특히 거창읍이라든지 읍‧면에 지금 보도가 되고 있지마는, 모르는 분이 많습니다. 홍보가 많이 되어가지고 한 사람이라도 더,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을 찾아가지고 증언을 듣도록 하는 일이 우리 의회에서 하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는 아무런 관계도 없고, 지금 분명히 말씀을 잘해 주셔도 뒤에 어렵고, 오해 받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언제든지 오셔가지고 증언을 해 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특히 또 위원장님께서 많은 연구도 하고 계시고, 또 선생님께서 그렇게 또 해 주시고 이러니까 저희들은 이걸 시작한 것을 보람있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아시고 많은 협조를 해 주실 것을 당부드리겠습니다. 이상입니다.
○소위원장 최용환 네, 고맙습니다. 다음은 여기에 오신 분들이, 진주에서 오신 분도 고향이 신원이십니까?
○참고인 엄명균 네, 그렇습니다.
○소위원장 최용환 아, 예, 대부분 신원유족들이 앞장서서 진상규명에 나서고 있습니다. 대단히 고맙습니다. 우리 위원 중에서는 부위원장을 맡고 계시는, 신원출신 김정회 위원이 부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부분들은 김정회 위원하고 연락을 취하셔가지고 일이 원만하게 될 수 있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 부위원장님, 한말씀 해 주십시오.
김정회 위원 예, 죄송합니다, 어르신들, 제가 오늘 신원 농협에 정기총회가 있어서 거기 참석하다 보니까 본의 아니게 조금 늦었습니다. 그 점 이해를 해 주시고요, 조금 전에 이수정 위원님이나 위원장님께서 좋은 말씀을 해 주셨고 저희도 이왕, 들어보니까 조금씩 윤곽을 잡아가는 것같습니다. 저희들이 힘닿는 데까지 또 그 과정들을 관철시키고 또 중앙정부나 다른 행정기관에 모든 걸 잘 정리를 해가지고 반영해서 꼭 이번 일이 성과가 있을 수 있는 방향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말씀과 또 여러 가지 사건 정황들이나 증언을 허심탄회하게 해 주시면 꼭 반영시키도록 하겠습니다.고맙습니다.
○소위원장 최용환 네, 소속 위원 중에서는 거창군의회 부의장님도 계십니다, 신현기 부의장님이 계시는데, 이 자리를 마감하는 정리말씀 한말씀 부탁드립니다.
신현기 위원 예, 신현기 위원입니다. 사실, 49년도에 일어난 사항들인데 지금 50년이 넘도록 가슴앓이만 해 오시고 그동안에 참 어려움이 너무 많았고 피해가 컸었습니다. 이제 많은 세월이 흐르고 또 정부가 몇 번 바뀌고 하니까 이런 사항들도, 저희들도 이렇게 조사를 하고 하지만, 국회에서도 아마, 어떤 방법으로든지 하게끔 준비를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저희들이 그 밑거름이 되기 위해서 지금 1차적으로 추진을 하고 있는 이 사항들을 좀 더 여러분들의 상세한 증언을 듣고, 또 많은 내용들을 취합해서 국회나 정부에 건의를 해서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억울하게 살아오신 명예를 조금이라도 회복되도록 하고, 그 보답이 될 수 있는 그런 역할을 하기 위해서 저희들이 이렇게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주변에도, 아마 신원에도 아직, 많은 명단은 있습니다마는 증언도 안 하시고 유족도 다 못 찾은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런 분들한테도 연결이 되시면 서로 연결을 하여 주셔가지고 많은 유족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시기를 당부드리고, 저희 위원회에서 열심히 해서 여러분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다 하는 말씀을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소위원장 최용환 네, 고맙습니다. 예, 마칠까 하는데 혹, 꼭 한 말씀하시고 싶은 분이 계시면 하셔도 되겠습니다. 위원장님, 하실 이야기 있으시면? (웃음)
○진술인 엄창주 제가 마지막에 (웃음), 저는 사실상, 여기에 발벗고 나섰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가 중학교 1학년이라는 어린 몸으로, 사실상 아버지가 그렇게 되고 나서 대학을 못 갔습니다. 교직에 있으면서 방송통신대학 교육과를 나와서 공직생활을 하고 했는데, 대학을 못 간 이유가 바로 50년 6월 7일인가, 보련 관계 학살 이후 몇 개월 안 가서 신원사건이 일어났거든요? 신원사건이 일어나고 나서 소개당하고 흉년 거듭 들고, 저는 머슴을 다니며 논 서마지기씩 1년 머슴장사해 주고 이래가지고 대학도 못 가고 솔직하게 그렇게 고생해서 자란 것을 생각하면 이 문제를 내가 어디까지나 진실을 바로 잡자 하는 것, 그것 하나는 제가 머리 속에 철두철미하게 있고 제가 사실상 서울, 부산 등지로 전화를 많이 합니다. 내가 하면서도 생각하면 자기 부모 그렇게 되었는데 내가 혼자 열나게 이래도 되겠느냐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이런 사람이 있어야 안되겠느냐, 그런 생각에서 하는데 그런 사람들은 저만큼 그런 관심이 없어 그런가 모르지마는 전화는 수 차례 받고도 (웃음) 누구는 못 온다는 연락 한번 받고, 서울 한 분이 전화가 왔어요, 못 온다고, 일부러 전화가 와가지고, 꼭 참여하려고 그랬는데 못 온다고 전화가 오고 했는데 사실상, 어쨌건 이런 과감한 일을 군의회에서 시작한 데 대해서, 이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50년이 넘은 일을 새로 이 사건을 진상을 조사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인데 그래도 의원님들은 과감하게 추진을 해가지고 오늘에까지 이르렀고, 오늘 이런 모임에서 있었던 증언을 토대로 해서 어디까지나 국회나 관계부처에 전달이 되어서 그런, 명예회복이 될 수 있는 알찬 진상조사가 되어서 하루속히 명예회복이 되도록 노력해 주실 것을 당부드립니다.
○소위원장 최용환 네, 고맙습니다. 혹 유족 여러분께서도 너무 많은 기대를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소위원회에서는 이런 사실들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그렇게 해서 희생자특별법안이 국회에서도 논의중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특히 우리 소위원회나 또 유족 들하고 힘을 합칠 때만이 이런 일들이, 왜곡된 역사가 바로 잡아지리라고 믿습니다. 끝까지 소위원회에도 격려와 박수를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예, 이상 보충증언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위원 여러분! 그리고 참석하신 여러분!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상으로 청원심사 소위원회 제4차 회의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산회를 선포합니다.
(14시35분 산회)


○출석위원(4인)
  최용환이수정김정회신현기
○출석전문위원(2인)
  전문위원하춘영
  전문위원김종두
○참석공무원
  사무과장윤생이
○진술인(3인)
  엄창주
  장현애
  엄명균
○참고인(2인)
  조익현
  한대수
○속기사
  정현정
○그외유족및참석인(5인)